google-site-verification: google00ba2143d583234e.html 1970년대 신민요 계보를 꿋꿋하게 이어간 가수 '조미미'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을 빛낸 유행가

1970년대 신민요 계보를 꿋꿋하게 이어간 가수 '조미미' 이야기

반응형
가수 조미미 (1947~2012) 음반 표지

가수 조미미는 1947년 전남 영광 출생이다. 목포여고를 졸업한 후, 1965년 7월 동아방송의 가요 콩쿠르인 ‘가요백일장’에서 1등에 입상함으로써 가요계에 데뷔했다.

'조미미'의 본명은 ‘조미자’였는데 음반제작사인 ‘지구레코드사’를 드나들 때, 이곳의 전속가수인 이미자와 이름이 같아서 ‘유정천리’ ‘대전 부르스’ 등을 만든 작곡가 김부해가 직접 지어준 예명이다.

조미미 흘러간 노래 음반 표지

당시 가수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온 '조미미'는 '신세기 레코드사'에 전속. '강화도 처녀'란 노래로 선을 보였다. 출발은 목포방송국이었으나 이때부터 사실상 가요계에 발을 붙이게 됐다.

그렇지만 초창기 조미미의 주가는 그다지 높은 게 못되었다.
극장 방송국의 '출연료'로 따져봐도 그녀는 항상 B급가수. 한번도 화려한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이른바 민요 삼총사인 <김세레나>, <김부자>, <조미미> 이들 세 가수 중 김세레나는 국내 가수중 최고수입의 가수가 돼 있었고, 김부자에 대한 대중적 인기도 부쩍 상승해있었다.

가수 조미미 (1947~2012) 음반 표지

그리고 이 시대 가요계의 특징은 신민요의 부흥으로 요약된다. 트롯 가요는 왜색가요 공방으로 몸살을 앓으면서도 기존의 신민요는 부흥기를 맞았다. 그 대표주자의 하나였던 가수 '조미미'.

1970년대 초반 '<선생님>'으로 스타반열에 오른 그녀는 공전의 히트곡 "<바다가 육지라면>, <서귀포를 아시나요?>,<단골손님>, <연락선> 등을 발표하면서 1960~70년대를 풍미했다.

당시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발표된 "선생님"이 담긴 앨범은 발매 1개월 만에 3만 장을 돌파했다. 전례 없는 불경기라고 울상인 당시에 3만장 돌파기록은 확실히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만 장이 팔려도 음반업계가 온통 떠들썩한 판에 3만 장이란 기록은 1년 만에 몇 개 나올까 말까 한 대단한 사건이었다.

특히 통기타 음악이 유행하던 1970년대의 포크음악 물결 속에서 신민요의 계보를 꿋꿋하게 이어간 가수가 바로 ‘조미미’였다.

가수 조미미 (1947~2012) 음반 표지

개인적으로 그녀는 사치를 모르는 실속파 가수였다. 자신이 7식구의 생계를 맡은 착실한 '가장'이었다. 오래전에 아버지를 잃은 그녀는 홀어머니. 다섯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다섯 동생 중 3명이 중고등학교 재학생. 이들의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가 맏딸인 그녀의 수입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사실상 <조미미>가 연예계에서 받은 귀여움은 이 살림꾼 적인 착실한 성격 때문인 것 같다.

조금 인기가 오르면 사치와 허영에 들떠 날뛰는 것 같은 속성이 그녀에게서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수 조미미 (1947~2012) 음반 표지

그녀의 노래는 고향을 떠나온 서민들이 애절한 향수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음악 세계는 호감을 주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 이런 것 때문에 그녀의 노래는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 어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다시 부르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이런 소박한 꿈이 현재의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같다.

그리고 <바다가 육지라면>,<선생님>에 이어지는 그녀의 노랫말 속에는 지금도 우리 어버이들의 그 시절 추억이 이른 아침, 호수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새록 새록 피어 오르고 있다.


■ 조미미 노래 감상하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