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 google00ba2143d583234e.html 일제강점기 노다지의 허망한 꿈을 풍자한 노래, 가수 김용환 '눈깔먼 노다지(노다지 타령)'
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을 빛낸 유행가

일제강점기 노다지의 허망한 꿈을 풍자한 노래, 가수 김용환 '눈깔먼 노다지(노다지 타령)'

반응형

일제강점기 우리 가요계의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던 가수 김용환(金龍煥, 1909~1949)

1.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 노다진지 칡뿌린지 알수가 없고나 / 금당나귀 나올까 기다렸더니 / 칠뿌리만 나오니 성화가 아니냐 / 엥여라차 차차 엥여라차 차차 / 눈깔먼 노다지야 어데가 묻혔길래 / 요다지 태우느냐 육천간장을 / 엥여라차 차차 엥여라차

2.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니 / 노다진지 노라진지 알수가 없구나 / 나오라는 노다진 나오지 않고 / 도라지가 나오니 애물이로구나 / 엥여라차 차차 엥여라차 차차 / 집 팔고 논 팔아서 모조리 바쳤건만 / 요다지 말리느냐 사람의 간을 / 엥여라차 차아 엥여라차

3.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 노다진지 요단지지 알수가 없구나 / 금가락지 한짝도 못해준다고 / 엥도라진 님의 속 무얼로 달래랴 / 엥여라차 차차 엥여라차 차차 / 하룻밤 흥망수는 물레와 같다지만 / 요다지 태우느냐 사람의 애를 / 엥여라차 차차 엥여라차 (김성집 작사, 조자룡(김용환) 작곡)

위 노랫말은 일제강점기 우리 가요계의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던 가수 김용환(金龍煥, 1909~1949)이 1939년에 발표한 신민요 '눈깔먼 노다지(노다지 타령)'이다.

이 곡은 출반 당시 ‘눈깔먼 노다지’라는 제목이었지만, 김용환이 세상을 뜬 1949년 이후부터는 동생 김정구가 무대에서 부르면서 대중에게는 ‘노다지 타령’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이 노래가 처음 듣는 사람에게도 즐겨 듣던 노래와 같은 친근감을 주는 것은 이 노래의 가락이 민요를 닮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이 노래는 1940년대 한때 무척 흥겹고, 그리고 유머 있게 불리던 서민의 노래였다.

김성집 작사, 조자룡(김용환) 작곡으로 그러니까 당시 들떠 있던 금광 붐에 패가망신하는 몰골들을 야유(揶揄)하는 노다지판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신민요이다.

그리고 당시 노다지에 들떠 있던 사회상의 편린을 엿보이는 이 노래가 오늘까지 남은 것은 오로지 이 노래의 가수이자 작곡가로서 우리나라 가요사에 큼직한 자취를 남긴 가수 김용환(金龍煥, 1909~1949)의 덕이다.

가수 김용환이 노래하는 모습(1945년)

그는 1909년 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인지라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서 음악을 접했다.

1920년대 말부터 고향인 원산에서 배우 겸 음악가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1930년대와 40년대 대단한 활약을 했던 가수이다. 연출가이기도 했고 작곡가이기도 했고 가수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배우로 활동했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또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가수 김정구(金貞九, 1916~1998)의 형이며, 소프라노 가수였던 김안라(金安羅, 1914~1974)의 오빠, 피아니스트였던 김정현(金貞賢, 1920~1987)이 동생, 그러니까 그들은 애초에 음악적 재능에 혜택받은 혈통의 음악가족이였다고 하겠다.

그는 특이한 하이톤과 역동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가요계의 왕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 아니라 1943년 나운규(羅雲奎)의 극영화 '아리랑'에서 영진역도 능숙하게 해내는 명연기 곧 명배우의 소질을 보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우리 가요계의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던 가수 김용환(金龍煥, 1909~1949)


그의 황금 시절에는 공연이 끝날 때면 장안 명기들이 보낸 인력거들이 즐비하게 기다려, 그와 함께 하룻밤의 풍류를 즐기려는 기생들의 소청을 전했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어떻든 이래서 '김용환'의 거의 신화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일대기가 남겨진 것이다.

특히 그는 1949년 40세를 일기로 홀연히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음악인으로서의 재능을 펼치며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줬다.

그리고 이 독특한 가사를 쓴 분은 '김성집'이다. '김성집'이라는 이름 외에 '김광'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분도 원산 출신이다. 그리고 원산에서 극단 관계일도 했고 이렇게 가사도 쓰기도 했으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는 영화에도 상당한 관련을 했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으로 활약한 셈이었다.

김용환의 아우였던 가수 김정구(金貞九, 1916~1998)

한편 당시 이 나라에는 때아닌 금광 선풍이 불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판 ' 골든 러쉬' 라고나 할까. 하여튼 야심도 좀 있고 또 호기도 좀 있는 사나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논밭이라도 팔아 금광판에 뛰어 들어가 노다지판을 잡은 것이 가장 큰 꿈의 하나였다.

그래서 어제까지 무일푼의 거지가 밤사이 백만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도는가 하면 누구는 세전 옥답 다 날리고 알거지가 되었다는 풍문도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잘 됐다는 소문 하나에 덩달아 망한 놈이 부지기수이기 마련이었다.

특히 나라가 무너져가는 대한제국 말기에는 외국인들이 몰려들어 우리나라 곳곳에서 금을 캐가려 안달했다.

그들은 거의 헐값으로 금을 노략질해 갔는데 금을 실어 가는 상자에는 “노 텃치(No Touch)"라고 붉은 글씨를 써놓고 호송인이 총으로 조선인의 접근을 막았다.

그 이전 나라에서 캐지 못하게 하여 ”별은(別銀)”이라고 불렀던 금은 그 뒤 “노다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그래서 조선의 금이 제 이름으로 불리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 외국인들의 노다지 노략질은 결국 한국 사람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도 곡괭이 하나씩 둘러메고 이 산 저 산 헤매며 금 캐기에 혈안이 되었다.

조선시대 경종 임금 때 가짜 공명첩을 만들어 일확천금을 꿈꾸려 했던 것처럼 대한제국 말기 많은 사람도 외국인들 영향으로 노다지의 허망한 꿈을 꾸었다.

가수 김정구가 1986년 KBS 한국방송 가요무대에서 노다지 타령을 부르는 모습.


이러한 세태가 한심했던지 '김용환'은 철두철미하게 세대 풍자적인 이 '노다지 타령'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기서 금광판의 시원스러운 그 어떤 기풍(氣風)..., 그러니까 투기, 모험, 집념 등 돈뿐만이 아닌 낭만의 요소가 깃들어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선율은 가사와는 달리 경쾌하고 밝으며 익살스럽다.

바로 그 자신이 무대에 서서 한복차림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뒷짐 진 포즈로 멋들어지게 구성진 목청으로 이 노래를 부를 적이면 온 관객은 같이 들떠버려 장내는 깨어질 듯한 박수갈채가 떠날 줄 몰랐다고 한다.

이 노래는 1939년 빅타 레코드에서 출반되어 삽시간에 레코드가를 휩쓰는 선풍적인 인기를 보였다.

김용환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 곡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아 청에 못이긴 친동생 김정구가 다시 녹음하여 음반으로 내놓은 것이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니 그 인기를 짐작할만하다.

▶ '눈깔먼 노다지(노다지 타령)' -김용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