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자의 인터뷰, <동백 아가씨>금지에 대하여
“20년 동안 부르지 못한 이 노래를 올해는 부르고 싶다”, 1984년 4월 20일 <동백아가씨> 등의 방송 및 판매금지 재심건의에서 “내가 노래를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너무 힘들었다”. -2016년 2월 28일 YTN 인터뷰-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오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가신님은 그 언제 그 어느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 오려나 (1964, 한산도 작사 / 백영호 작곡)
'동백 아가씨'의 경이적인 히트로 이미자는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미자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가 부르는 모든 노래가 '미자 스타일' 속에 완전히 용해된다는 것이다.
매끈한 창법이라든가, 아주 고운 비단 옷감을 만져보는 촉감 같은 느낌, 아니 더 깊이 표현한다면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고 난 사람이, 이제는 그런 감정에서 벗어난 위치에서 인생을 이야기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미자'의 노래 속에서 인생의 깊은 슬픔과 고통을 느끼지만, 그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므로 옛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여유 있는 감흥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노래들은 조그마한 티라든가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다. 매우 잘 정돈되고 깨끗한 보석 알을 보는 느낌이 든다. '동백 아가씨'는 이러한 이미자 스타일을 결정한 곡이라 하겠다.
그녀가 1964년 발표한 동백 아가씨는 당시 김기 감독이 연출하고 신성일, 엄앵란이 열연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였다.
노래는 원래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최숙자가 취입할 예정이었으나, 계약금액 문제로 지구 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이 백영호 선생의 곡을 받아 딸 정재은을 임신하고 있던 이미자에게 주어 녹음한 것이었다.
곡 자체도 좋았고, 특별한 감정을 붙이지 않아도 저절로 감동이 우러나왔다. 특히 가사의 내용에 충실한 감정을 가지고 부르다 보니 애절한 노래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라디오에서 거리에서 어디에서든 동백 아가씨가 흘러나왔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탄생이었다.
이 노래는 국내 가요사상 최초로 가요프로그램에서 35주(약 9개월) 동안 1위를 하고, 한국 음반 사상 처음으로 10만 장을 돌파한 판매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1964년의 대히트로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지만 불과 1년 만에 방송금지 조치를 당한 이 노래는 23년이 지난 1987년에서야 방송금지가 해제되었다.
유행가라는 말처럼 유행이 지나면 잊히는 게 속성이겠지만, 이 노래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사랑을 받는 국민가요이며 현재도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하고 있다. 몹시 아픈 역사를 지닌 명곡이다.
1965년 9월 초, 서울중앙·기독교·문화·동아·중앙라디오 5개국 음악과 대표들이 <왜색조> <저속한 리듬·멜로디>의 음악은 방송에 내보내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그 대표적인 노래로 “동백 아가씨”를 꼽고 총 7곡을 선정하였다. 물론 작곡가와 레코드회사는 기준의 모호성 등을 이유로 크게 반발하였다.
이 조치에 앞서 4월에는 월북 작가의 작품 50곡에 대한 금지 조치가 발표되는 등 5·16 이후 권력자들은 가요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통제조치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폭압 속에서 이미자는 정말로 20년 동안 “동백 아가씨”를 부르지 못하였을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색조’라는 이유로 방송금지처분을 받은 이후 우리 곁을 떠났을 때도 그 노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전해졌다.
1960년대 파독 광부는 깊은 갱도 밑에서 작은 트랜지스터를 붙여두고 '동백 아가씨'를 들으며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했다. 그 힘으로 역경을 이겨나가며 가족을 살렸다.
또 1979년 후쿠다 전 일본 수상을 위한 청와대 만찬 자리에 초대된 이미자, 이 무대에서 그녀가 부른 노래는 당연히 동백 아가씨이었다.
당시 대통령이 좋아했던 노래가 바로 동백 아가씨였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던 서민들로부터 당시 대통령까지 전 국민을 사랑을 받았다.
이후 이미자하면 동백 아가씨이었고, 동백 아가씨 하면 이미자'로 통할만큼 이 노래의 경이적인 히트로 이미자는 불멸의 가수가 돼버렸다.
국군이 파병됐던 베트남 전쟁터에서는 동백아가씨가 비둘기부대의 사단가처럼 불리기도 할 정도였다. 물론 이미자는 파월 장병 위문 공연 가수 중에서 가장 인기 높은 가수였다.
▶ 이미자 '동백 아가씨'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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