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음기가 우리나라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엽으로 1860년대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통해서 처음 소개되었다.
유성기로 불렸던 이 축음기는 진기하기만 했다. 축음기(蓄音機)는 말 그대로 “소리를 쌓아두는 기계”인데 이를 처음 본 조선 관리는 이 축음기를 “귀신 소리 나는 기계”라고 했다고 한다.
맨 처음 활동사진이 들어왔을 때 영사가 끝난 후 옥양목 스크린을 두드렸고, 맨 처음 서울 장안에 YMCA 회관이 들어섰을 때 벽돌집이 무너질까 봐 행인들이 그 밑을 지나가길 겁냈던 것처럼, 축음기는 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약삭빠른 장사치들은 이 축음기와 레코드를 가지고 전국을 순회하며 장터에 천막을 치고 돈을 받고 들려주는 영업을 하기도 했다. 처음 들어온 레코드는 거의 일본 노래나 서양음악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노래의 첫 녹음으로 남아 있는 레코드는 1907년에 나온 것이며, 이후 연예계를 주름잡던 '이기세'가 파고다공원 맞은편에 일본 일동 레코드의 지점을 차리고 우리 명창들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녹음을 하기도 했다.
남도잡가는 김창룡, 이동백, 이화중선 경기잡가와 서도잡가는 이진봉, 이영산홍 등이 있었다. 남도소리엔 '새타령', '육자백이', '춘향전' 몇 대목, 경기잡가와 서도잡가 중엔 '노랫가락', '창부타령', '사설난봉가', '수심가' 등의 여러 곡이 녹음됐지만 '이팔청춘가'가 그 중 애창되었다고 한다.
또 명창 박춘재는 1887년에 미국의 빅터레코드사로 건너가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자 덩달아 축음기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때는 축음기를 사려면 회사원이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었기에 축음기를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라 하였고 그 탓에 축음기를 가진 총각에게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일선 가야금 병창 ' 이팔청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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