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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빛낸 유행가

조선의 슈베르트, '작곡가 이재호' 짧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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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슈베르트 '작곡가 이재호'(1919∼1960)

작곡가 이재호(1919∼1960)는 1919년 진주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어려서 형에게 트럼펫을 배웠고, 진주고등보통학교(진주고)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습니다.

귀국 후 처음에는 리갈, 콜롬비아레코드에서 무적인이라는 필명으로 작사·작곡을 해오다가 곧 태평레코드로 옮겨 이재호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태평레코드의 중추적인 작곡가로 자리잡았습니다.

작곡가 이재호(1938년) 인천 송도에서

1940년대초 작은 규모의 태평레코드가 가장 큰 규모의 오케레코드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소속된 가수 몇사람이 타 레코드 회사의 여러사람의 가수가 발표하는 수십장의 레코드보다 더 큰 판매량을 보였기 때문이며, 태평레코드사에서 이 곡들의 작곡을 대부분 이재호가 담당하였습니다.

작곡가 이재호가 연주하는 모습(1941년)
작곡가 이재호가 연주하는 모습(1941년)

오케레코드에 박시춘, 남인수 콤비가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였다면 이에 반해 태평레코드에서는 이재호, 백년설 콤비가 있었으며 1940년대 초에 연이어 스타로 성장하는 백년설, 진방남, 백난아 등이 모두 태평레코드에서 이재호의 곡을 받아 데뷔, 스타로 자리잡았습니다.

이후 진방남(반야월)이 작사가로 변신하면서 이재호와 콤비를 이뤄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는 인연도 태평레코드와 관계가 있습니다.

1948년 간행된 이재호 신작곡집
동양의 슈베르트 '작곡가 이재호'(1919∼1960)

광복 후에는 잠시 고향 진주에서 모교인 진주중학교 음악교사를 지냅니다. 이때 작곡가 이봉조(1931~1987)가 제자였습니다. 이봉조는 남해에서 출생해 진주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이재호는 동시기에 활동하던 박시춘, 손목인 등과 더불어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작곡가로 자리잡으며 세사람 모두 광복이후 1960년대까지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였습니다.

[ 이재호 작곡 특선 8 ]

1. 나그네 설움 / 백년설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1940년)

광복이전 최고의 판매고(10만장)를 올린 히트곡. 불과 1년전(39년)에 데뷔한 백년설이 당대 최고의 가수인 채규엽, 남인수를 일시 능가할 만큼 인기를 얻게된 곡으로, 작은 규모의 레코드 회사인 태평레코드의 이재호, 백년설의 콤비(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등)는 가장 규모가 크던 오케레코드의 남인수, 박시춘 콤비에 필적할 만큼 인기를 얻었다. 이에 자극받아 오케레코드는 물밑 작업을 통해 벌금과 제약을 모두 감수하면서 당대 최고의 전속금을 지불하고 41년 백년설을 스카웃하였다.

2. 산유화 / 남인수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1952)

동향인 진주출신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광복이전에는 인연이 없던 두사람이 만나서 빚은 가요사상 최고의 명곡 중 하나. 가수 진방남에서 작사가로 입지를 일군 반야월이 소월의 시에서 차용한 듯한 노랫말을 짓고, 최고의 작곡가 이재호가 3박자의 왈츠로 완성도 높은 곡을 만들었다. 더구나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가수 남인수가 클래식 창법으로 절창하여 명곡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3. 경상도 아가씨 / 박재홍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1953)

6.25라는 참담한 전쟁의 와중에서 부산은 피난민들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판자집과 국제시장에는 하루를 연명하는 피난민들의 몸부림이 넘쳤고 그 속에서도 남녀간의 사랑은 싹텄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가요 중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남인수)”,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등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곡 중 하나다. 박재홍은 40년대 말에 “울고 넘는 박달재”로 인기를 얻으며 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백년설과 비슷한 음색으로 인하여 백년설의 히트곡을 여러곡 재취입하기도 하였다.

4. 울어라 기타줄아 / 손인호 (무적인 작사, 이재호 작곡, 1957)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은 많고 더불어 사람사는 곳에 역시 슬픈 사랑의 역사도 이어진다. 손인호는 처음에 레코드 녹음기사로 출발하였으나 가수로 데뷔한 이후 “비 내리는 호남선”, “하룻밤 풋사랑”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5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다. 동시기에 안다성, 방운아, 명국환, 유춘산, 원방현, 허민 등이 신인가수로 등장하엿다.

5. 단장의 미아리고개 / 이해연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1956)

1.4후퇴후 잿더미가 된 서울에 돌아오니,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던 부인은 영양실조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었고 차녀 수라(당시 6세)양은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해 숨져 입은 옷 그대로 언땅에 묻어야 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작사가 반야월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른 이해연은 41년에 데뷔하여 “뗏목 이천리”, “소주 뱃사공” 등의 노래를 부르며 43년에 발표된 인기유행가수 군상(조광 1943년 5월호)에 언급된 열네명에 속할 만큼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데뷔 15년이 지난후 “단장의 미아리고개”로 인하여 다시금 히트가수로 각인되었다.

6. 불효자는 웁니다 / 진방남 (김영일 작사, 이재호 작곡, 1940)

가수로서 진방남의 최고 히트곡이다. 작사가 반야월로 활동하기 전의 가수로서의 예명이 진방남이며 본명은 박창오다. 39년 조선일보 감천지국 가요콩쿨에서 1등으로 당선하여 태평레코드에서 백년설과 같은 해(39년)에 데뷔하였다. 42년 “넋두리 이십년”을 처음으로 가사를 만든 이후 한국 가요사상 가장 많은 삼천여곡의 가사를 만들었다. 이재호와 콤비로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7. 갈매기 쌍쌍 / 백난아 (처녀림 작사, 이재호 작곡, 1940)

백난아는 태평레코드에서 주최한 전국콩쿨에서 입상하여 40년에 “오동동 극단”으로 데뷔하였다. 역시 43년 발행된 “조광” 5월호에 언급된 인기유행가수에 속하였으며, 이는 같은 회사(태평레코드)에서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백년설, 진방남과 더불어 한때 오케레코드를 맹추격하던 태평레코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의 태평의 중추적인 작곡가는 이재호였으며 대부분의 히트곡이 그의 작품이다.

8. 산장의 여인 / 권혜경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1957)

“호반의 벤치”, “첫사랑의 화원”, “산장의 여인” 등의 히트곡을 남기며 1960년대까지 풍미한 권혜경의 대표곡이다. 노랫말처럼 슬픈 삶을 살았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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