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 google00ba2143d583234e.html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국악인' 카테고리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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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해야 할 국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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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리아 칼라스 박초월 명창 국창 박초월(朴初月, 1917. 2. 20. ~ 1983.11.26)은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전라북도 남원에서 자랐는데 김정문(金正文)ㆍ송만갑(宋萬甲)ㆍ임방울(林芳蔚)ㆍ정광수(丁珖秀) 등 당대의 명창들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대금연주자 서용석과 판소리꾼 조통달의 이모이기도 하다. 박초월(본명 박삼순(朴三順)은 시골 부잣집 며느리의 느낌을 주는 후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늘 곳간 문을 열어두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나누어 먹였던 것이다. 말년에 목이 갑자기 상해버리긴 했지만, 박초월은 꾀꼬리 소리라 불릴 정도로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김소희의 소리가 맑고 깔끔한 것이라면, 박초월의 소리는 편하고 소탈하게 풀어내는 매력을 갖고..
한국 신무용의 초석을 다진 무용가 김백봉에 관한 짧은 정리 김백봉(1927~2023. 4. 11)은 192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4살이던 1941년 일본 도쿄에 있는 최승희 무용연구소 문하생으로 들어가 이듬해 무용수로 데뷔했다. '김백봉'은 방안춤(입춤 중 기방妓房이나 집안에서 추는 춤)을 무대화하여 현대 공연물로 자리 잡아가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부채춤의 안무에서 많은 활약을 했는데 1968년 멕시코 올림픽서 군무로 선보이며 세계 속에 한국 춤의 아름다움을 크게 알려 화제를 모은바 있다. 이후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2천명의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대형 군무 ‘화관무’를 선보이는 등 평생 600여 편이 넘는 창작춤을 만든 그는 ‘신무용’의 대모로 불리며 2005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김백봉은 누구보다도 강렬한 예술..
전설로 남은 가야금 산조의 명인 ‘안기옥’ 가야금 역사상 최고였다는 찬사가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는 가야금 명인 안기옥(1894~1974).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예인이자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월북 음악가‘ 이다. 안기옥은 1894년 전남 나주 출생이다. 꽹과리와 피리로 명성을 떨쳤던 아버지 안영길(安永吉)의 영향을 받았다. 1904년 이후 8살 때 김달진에게 가야금 병창을, 한숙구, 김창조 등에게 가야금과 거문고, 아쟁, 장고, 꽹과리를, 1915년에 백낙준에게는 거문고를 배웠다. 1916년부터 남원협률사를 중심으로 연주 활동을 한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징역을 살았고, 1926년 일본인 위안공연을 거부하여 구류를 당한 바 있다. 특히 조선 음악의 명맥이 위태로운 상황에도 협률사, 조선 음악연구회, 조선창극단, 한성준 조선 ..
천하제일 가무악 명인 춘당 김수악 강산(江山) 제일의 춤꾼'으로 불리며 진주검무로 국가 무형문화재(제12호)에 지정되는 등 명성을 날렸던 춘당 김수악 선생! 그는 생전에 열정적인 예술혼을 불사르며 우리나라 전통 가무악 계승·발전에 큰 획을 그은 국악인이다. 김수악 선생은 1925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1933년(9세)에 진주권번에 입학해 각종 춤(검무 포함)을 비롯해 정가(시조·가곡), 판소리 5바탕(수궁가, 적벽가,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구음, 가야금·아쟁 및 병창 등을 두루 배웠다. 김수악 선생은 1955년 그의 나이 30세 때 진주에 경상남도 최초로 민속예술학원을 개설한 이래 평생 국악 후진 양성에 헌신했다. 또한 진주검무, 진주 교방굿거리춤, 김수악 논개 살풀이춤, 김수악 살풀이춤, 장고, 그리고 헛간에 서 있던 도리..
진도 출신의 강강술래 명인 '양홍도'에 관한 짧은 정리 우리나라의 무형문화재 제도는 1964년에 “종묘제례악”을 제1호로 지정하면서 시작되어 그 기능보유자를 인간문화재로 칭하였으며, 2015년에 “아리랑”을 제129호로 지정하면서 처음으로 기능보유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1965년에 ‘강강술래’가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제9호로 등록될 때, 그 보유자로 양홍도(진도), 김길임(해남) 두 사람이 지정되었고, 이때의 “강강술래”는 진도와 해남의 형식이 달랐다고 한다. 특히 '양홍도'는 진도 출신이며 권번에서 창을 배운 명창으로 알려졌다. '육자배기'와 '진강강술래'에 빼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성량이 풍부하고 목청이 좋아서, 한자리에 앉아 백절이 넘는 강강술래를 거뜬히 부를 정도로 천부적인 소리꾼이었다. 이분의 인생은 매우 고난스러웠는데 자료마다 출생 연도..
일제강점기 국악계 큰별, 판소리 여류명창 김초향 김초향(1900~1984)은 일제강점기에 판소리사상 최고의 여류 명창으로 손꼽히는 이화중선(1899~1943)과 쌍벽을 이뤘으며,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록주(1905~1979)가 손꼽은 소리꾼이었다. 김초향은 1900년 대구 성내에서 태어나 13세 때 모친을 잃고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생각에 무대에 섰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해 부친마저 세상을 뜨자 동생들을 데리고 상경하여 ‘극장 장안사’ 소속 배우로 활동하게 된다. 정정렬, 송만갑, 이동백 등에게서 판소리를 사사했으며, 20세 무렵 대구에서 열린 명창대회에서 당대 일인자였던 김녹주와 백중한 실력을 보임으로써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심청가」 중 , 「춘향가」 중 과 을 뛰어나게 잘 불렀으며, 동편소리 「흥보가」에도 뛰어났다. 또한 단가 을 직..
1930년대 서도민요에 판소리, 연극까지 두루 섭렵한 소리꾼 박월정 일제강점기 판소리 대중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고도 판소리사에서 잊혀진 서도소리 명창 박월정(朴月庭. 예명 朴錦紅. 1901 ~ ?) 그녀는 1930년대 서도민요와 호남 지방의 판소리를 두루 섭렵한 소리꾼으로 유명했다. 판소리꾼 대부분이 전라도·충청도 등 한강 이남 출신인 반면, 박월정은 한강 이북 출신이다. 그녀는 1901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9세에 황해도 봉산 사리원에서 서도소리, 판소리, 탈춤 등을 배운 후, 13세에 서울로 상경해 대표적인 극장인 장안사 소속 배우로 일한다. 조선구파배우조합 소리꾼으로 이동백, 김창룡 등과 오랫동안 활동하며, 1922년에는 신연극운동을 주도한 연극좌에 가입한다. 1925년 하규일, 김창룡 등과 함께 일동 레코드에 음반 취입을 하는데, 이때 서도소리, 경기소리..
중고제 판소리의 거장 ‘국창 이동백' 판소리 유파에는 크게 서편제, 동편제와 중고제라는 것이 있다. 이 가운데 서편제는 영화 ‘서편제’로 많이 알려진 것으로 소리가 애절하고 기교적이고 붙임새도 다양하고 소리의 꼬리도 길어져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그런가 하면 동편제 소리는 대마디 대장단을 선호하며 잔 기교보다는 소리 자체를 통성으로 꿋꿋하고 튼실하게 내 쇠망치로 내리치듯이 마친다고도 한다. 그런데 중고제는 그 맥이 별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한겨레음악대사전》에서 중고제(中高制)의 설명을 찾아보면 “동편제(東便制)나 서편제(西便制)가 아닌 그 중간에 해당되는 유파라는 뜻의 중고제는 경기도 남쪽 지방 및 충청도 지방에서 성행(盛行)한 유파이다.”라고 되어 있다. 중고제는 서산지역의 심정순, 심화영 등 심씨 일가에서 전승해왔으며, 후기 5명..
창부타령으로 천하를 진동시킨 고 전태용 선생 짧은 정리 전태용(1922~1990) 선생은 경기도 영종 출생입니다. 1960~1980년대에 지갑성, 지영희, 김광식, 이충선, 성금연 등과 함께 KBS방송국 전속 국악단 등에서 악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원래는 피리와 해금 연주자로 활동하였지만, 경기소리 명창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현재 활동 중인 경기소리 명창 전숙희의 부친입니다. 활동 당시 '창부타령'과 '뱃노래', '노랫가락' 등을 독특한 구성으로 불러 동료 예인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소리 무대가 공연 뒤풀이나 회갑 잔치, 생일잔치 등 사석에서 이뤄져 당시에는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전태용 선생은 성량이 매우 부족하였지만, 그 불리한 조건을 스스로의 편곡 능력으로 극복하여 자유자재의 성음을 구사하였다고 합니다. 가성을 많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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