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 google00ba2143d583234e.html 식민지 대중의 폐부를 찌르는 이 노래, 고복수 ‘타향(타향살이)’
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을 빛낸 유행가

식민지 대중의 폐부를 찌르는 이 노래, 고복수 ‘타향(타향살이)’

반응형
가수 고복수 음반 (1911 ~1972)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금릉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 1934년)
 
위 노랫말은 금릉인 작사, 손목인 작곡으로 '고복수'가 노래한 '타향(타향살이)'이다. 지금은 흔히 '타향살이'로 제목이 불리고 있지만 1934년에 발표될 당시 제목은 '타향'이었다.
 
그런데 가사 첫대목이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이렇게 시작하다 보니까 그것이 제목으로 굳어진 것이었다.
 
'타향(타향살이)'은 고향을 그리는 주제로 일제강점기에 그렇게 많이 발표된 유행가 중에서도 단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게 되는 걸작이다.
 

고복수 타향(타향살이) 음반
고복수 타향(타향살이)가사지

 

1934년에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한 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가수 '고복수'가 이후 오케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 선보인 처녀작으로 1934년부터 오케레코드에서 작곡을 시작한 신진 작곡가 손목인의 출세작이다. 그리고 1933년 오케레코드사 창립 때부터 1937년 한창 시절에 요절할 때까지 주옥같은 유행가 가사를 써냈던 작사가 '금릉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1930년대 일제의 학정이 날로 심하여지자, 동포 중에는 기약 없이 만주로 또는 북간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불어만 갔다. 그 무렵 그들이 비분을 달래며 애절하게 목메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타향살이'였다고 한다.
 

음반사 유행가 선곡집에 수록된 타향 악보(1940년 간행)

특히 고향을 떠난 슬픔, 나라를 잃은 탄식, 일제에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의 한, 이 망향가는 국내뿐만 아니라 간도와 만주, 일본 등의 한인사회에서도 큰 인기를 얻으며 퍼져나갔다
 
가수 고복수의 흐느끼듯 떨리는 목청으로 흘러나오는 이 노래는, 그 당시 듣는이로 하여금 민족의 비분을 공감케하여 누구나 부등켜안고 울음의 홍수를 이뤘던 노래다.
 
그가 북간도 용정에서 순회공연을 갔을 때, 이 노래를 부르자 장내는 흐느끼는 울음소리로 눈물바다를 이루었고, 한 여인은 그 비탄을 달랠 길 없이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고 하니 그의 노래가 주었던 감동은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황금심, 고복수, 신 카나리아(왼쪽부터)

가수 고복수는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 앞 비석에는 영원히 기억될 노래 '타향살이'의 가사가 3절까지 새겨져 그 옛날의 감격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고복수 타향(타향살이) 감상하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