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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빛낸 유행가

봄이면 그리워지는 이 노래 강홍식 '처녀 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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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조선의 스타 영화배우 겸 가수 강홍식


봄은 왔네 봄이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 나물 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 / 산들산들 부는 바람 아리랑 타령이 절로 난다 흥

호미 들고 밭가는 저 총각의 가슴에도 / 봄은 찾아 왔다고 피는 끓어 울렁울렁 / 콧노래도 구성지다 멋들어지게 들려오네 흥

봄 아가씨 긴 한숨 꽃바구니 내던지고 / 버들가지 꺾더니 양지쪽에 반만 누워 / 장도든 손 싹둑싹둑 피리 만들어 부는구나 흥

노래 실은 봄바람 은은하게 불어오네 / 늙은 총각 기막혀 호미자루 내던지고 / 피리소리 맞춰 가며 신세타령을 하는구나 흥 (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1934년)

위 노랫말은 1930년대에 많은 인기를 끌었던 유행가 ‘처녀총각’이다.

조선민요의 정취를 잘 표현한 이 노래는 1934년에 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으로 강홍식이 발표한 창작 신민요이다.

'처녀총각'은 1930년대 신민요의 유행을 선도한 작품으로 요즘도 봄만 되면 어디선가 들을 수 있는 노래이다.

특히 '처녀총각’은 남북한 모두 즐겨 부르는 노래로 분단을 뛰어넘은 몇 안 되는 가요작품 중 하나이다. 분단 이후 북한에서도 제목과 가사를 바꾸어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

1934년 2월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강홍식-처녀 총각 음반


발표 후 엄청나게 히트하여 조선의 음반 판매량 중 상당 부분을 이 노래가 차지했다.

'처녀총각'은 한국을 넘어 알려지기로는 일본에서 1940년 이후 일본어로 번안되어 불렸으며 경음악으로도 유행했다.

또한 1959년 당시 서울음대 재학중 독일로 유학하여 그곳에 정착한 당대의 유명한 성악가였던 리리파(LILIFA) (한국이름 최정환)에 의해 유럽에 알려진 가장 유명한 한국의 노래 중 한 곡이었다.

제목은 Wind Bei Nacht(밤에 속삭이는 바람)으로 경쾌하게 편곡해 독일어로 발표했다.

1943년 일본에서 발매된 처녀총각 연주음반
리리파(LILIFA)가 독일어로 부른 처녀 총각(Wind Bei Nacht(밤에 속삭이는 바람) 음반


이 노래의 내력은 1934년 지금으로부터 87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극단 ‘단성사(團成社)’의 음악 담당이었던 작곡가 김준영의 남다른 감각과 솜씨로 만들어졌다.

잔뜩 찌푸린 어느 날, 작곡가 김준영과 가수 강홍식이 함께 어울리고 보니 술이 없을 수 없다.

일행은 아에 국일관 뒤 어느 여관방에 들어앉아 술자리를 벌였다. 그러니까 밤낮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술이 거나하게 순배 되고 주홍이 도도해지자 강홍식이 저도 모르게 '흥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늘 듣던 '흥타령'이었지만 그날따라 김준명의 귀에는 그 가락이 신선하고도 새로운 매력을 가지고 들려왔다.

얼큰히 취하면 도리어 작품의 영감과 의욕이 발동한다는 김준영이 곡의 주제를 변조시켜 한 노래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면 곧장 행동에 옮기는 김준영은 즉석에서 이것을 제의하고 이 제의가 받아들여져 가지고 있던 오선지에 그려낸 것이 이 노래이다.

처녀총각 신문 광고


노래는 강홍식이 불러 1934년 2월에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출반하게 되었다.

경쾌하기만 한 멜로디, 거기에 절로 어깨춤이 나오도록 흥겨운 리듬감, 더구나 여기에 화창한 봄기운까지 감돌게 한 목가풍의 노래가 나오면서 히트로 돌입했다.

당시 3만 매가 넘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올린 이 한 곡으로 강홍식은 월간지 삼천리에서 집계하는 남자가수 인기투표에서 4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여기서 얻은 수입으로 작곡가 김준영은 그렇게 소원하던 피아노를 장만하게 했으며, 강홍식이 낙산에 양옥을 마련할 수 있게 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처녀총각을 소개한 일본 연주 음반 가사지. 1943년 제작


그뿐만 아니라 이 음반의 판매성향은 레코드사의 기업적 가능성을 결정짓는 한 계기가 되었다고도 알려졌다.

작곡가 김준영은 그 뒤 서울중앙방송국의 피아노를 담당하는 한편 편곡도 담당했으며, 한때는 일본의 쇼찌꾸 영화회사의 음악부장이라는 한국인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자리를 무난히 치려 내어 그의 실력을 과시했다.

1930년대 조선의 스타 영화배우 겸 가수 강홍식


'처녀 총각'을 처음 부른 북한의 ‘공훈 예술가’ 강홍식은 190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무용을 배우고 돌아와 영화배우와 가수로 활약하다 영화배우이자 가수였던 전옥(全玉, 1911~1969)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는데 맏딸은 남한의 강효실(姜孝實, 1930~1996), 그 아우는 북한의 강효선(姜孝仙)이다. 모두 배우로 활동했다.

강홍식은 전옥과 헤어진 뒤 딸을 데리고 북으로 가서 활동했다. 강효실은 6·25 때 북진한 국군을 찾아가 문예대를 따라 내려왔다. 뒷날 최무룡과 결혼하여 최민수를 낳아 연예가족을 이루었다. 강홍식은 1971년에 요덕수용소에서 별세했다.

▶ 강홍식 처녀총각 감상하기


▶ 리리파(LILIFA)가 독일어로 부른 처녀 총각(Wind Bei N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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