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의 등장은 1977년 말이다. 서울대학 농대에서 잠사과에 재학하던 장남 “김창완”(기타, 1954년 2월생), 똑같이 서울대 농대에서 식품 가공학을 연구하던 차남 김창훈(베이스, 1956년 3월생), 고려대학 기계공학과에 재학중이던 삼남 김창익(드럼) 3형제로 구성된 이 밴드는 데뷔곡 '아니벌써'를 들고 한국에 록이 무엇인가를 고시하려는 듯 등장했다.
이 곡의 데모테입은 여러군데에서 레코드 제작이 거절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AFKN에서 걸려 나올 곡이 팔릴 턱이 없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또 1975년에서 시작된 가요정화운동이 외래의 유약한 문화를 극력 배제하려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들의 데뷔앨범은 크게 힛트했다. 그때까지의 가요 그룹사운드와는 동떨어지게 시원하고 화끈한 사운드와 비로서 '록'이라고 부를 만한 곡 형태, 눈물이나 이별이 아닌 일상적인 기분을 밝고 드라이한 감각으로 표현한 가사, 여기에 김창완이 연주하는 트릭키하고도 스릴있는 퍼즈 기타등 모든 것이 참신했다.
리더인 김창완은 은테 안경에 평점한 양복차림이라는, 아무리 보아도 고등학교 화학선생이라면 어울릴 모습으로 이렇다할 매력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한국 록 음악의 대표자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아도 번득이는 재주와 높은 뜻을 가진 천재형의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김창완 작품의 매력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과 고운 노랫말 일것이다.
산울림은 이듬해인 1978년 여름에 이어 두 번째 앨범 '내 마음에 주단을깔고'에서는 메탈복스에서 들려주는 금속적인 기타 사운드를 이미 시도하고 있었다는 가공할 사실도 있다.
기타, 베이스, 드럼, 여기에 김창완이 연주하는 올겐이 더해진다는 정도의 편성임에도 불구하고, 연이어 발표한 세 번째 앨범의 A면에서는 그 면 전부를 소비하여 18분 30초 에 이르는 '그대는 이미 나'라는 대작에 도전하고 있다.
과감하다고 할까, 그 재능이 시키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김창완의 머릿속에는 “예스"(YES)나 킹크림슨과 같이 프로그레시브 록의 세계가 그려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사운드면에서는 이들 프로그레시브를 능가하고 있지 못하지만 악기에 의지 하지 않고 의욕하나로 내쳐 들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그 높은 뜻을 압도적으로”예스“의 파워를 능가하고 있다고 단언할수 있다.
1978년 말에 산울림은 TBC 가요대상의 중창부분에서 제1위가 되고 있다. 그 뒤에도 “내 마음은 황무지”, “어느날 갑자기” 등의 힛트곡을 내놓았지만, 79년에서 80년에 걸쳐 동생둘을 병역에 복무하게 한다는 장벽에 부딛친다.
그러나 천재 김창완은 혼자서 드럼과 베이스를 오버 더빙, 혼자서 “산울림”으로서 앨범 두장을 훌륭하게 만들어 내고, 뿐만 아니라 '노고지리','로커스트'의 두 밴드의 프로듀스까지 손을 대는 활약상을 보인다.
물론 1982년에 동생 둘이 복귀한 뒤의 산울림은 이러한 반동도 있어서 훨씬 더 큰 열기를 보이게 된다.
또 7집에서는 솔리드한 기타가 울리는 가운데서 '가지마오'가 부활을 알리듯 크게 히트, 이어 나온 8집에서는 “토킹 헤즈”타입의 시원스러움을 보여주는가 하면 9집에서는 '코리언 뱅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소낙비'에서 동생 김창훈이 강한 보컬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때 까지의 집대성을 보이듯 여러 스타일의 기타 워크를 구사한 10집에서 그들의 음악은 경지에 이른다.
이 10집을 발표한 84년 6월에 그룹으로서 한때 활동을 멈출때까지의 8년간, 동일 디자인으로 색과 일러스트를 달리하는 레귤러 앨범 10장, 새로운 록 동요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용 곡집 3장, 토탈 13장 전 138곡을 발표하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두가 오리지날 창작곡 이라는 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으로 가히 천재적이라고 할 수 밖 에 없다.
그 뒤 김창완은 포크 타입의 곡을 중심으로 한 2장의 솔로앨범을 발표하고, “꾸러기들의 굴뚝여행“ 이라는 6인조 포크 유니트를 만들어 활동을 하게된다.
1991년 12집'Adajio'를 발표했지만 이전에 산울림의 음악과는 완전히 이별한 포근한 분위기의 곡들로 채워져 라디오에서 거의 들을 수 없는, 참혹한 실패를 경험했다.
이후 빅쇼, 락 인더 코리아, 문막공연 등을 통해 재결합한 형제는 1997년 산울림 13집을 발표해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후 다시 공백을 가진 산울림은 2006년 30주년을 맞아 공연하는 등 재결합하여 14집을 준비하던 중에 2008년 1월 29일 형제 중 막내인 김창익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지게차 사고로 사망하면서 공식해체하였다.
2008년 11월 25일 산울림의 삼형제 중 맏형인 김창완이 산울림 시절 발매했던 1집 ~ 13집과 산울림 동요 1집 ~ 4집을 모두 엮어서 산울림 전집인‘The Story of Sanullim - Complete Studio Recordings’를 발매하였다.
그리고 산울림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해산이 아니라 휴식이라고 말한다. 어떻든 산울림의 등장은 그때 까지 포크 일변도였던 학생들을 크게 자극하여 본격적인 록 그룹의 출현을 보게된다.
▶ 산울림 아니벌써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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