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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빛낸 유행가

고독한 방랑자의 노래, 백년설 나그네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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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설움이 실린 백년설 음반표지

1.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 / 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2. 타관땅 밟아서 돈지 십 년 넘어 반평생 / 사나이 가슴속에 한이 서린다 /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3.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 가야할 지평선에 태양도 없어 / 새벽별 찬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쏘냐

1940년 2월 태평레코드에서 발매된 '나그네 설움'은 고려성(본명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으로 '백년설'이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이다.

1938년. 이미 작사가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던 고려성(본명 조경환)과 가수로서 주목을 받고 있던 '백년설'이 광화문 뒷골목의 어느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주모가 따라주는 사발술을 말없이 받아 꿀꺽꿀꺽 단숨에 마시고 난 두 사람에게는 그날따라 술맛도 씁쓸했던지 침울한 표정은 영 풀릴 줄 몰랐다.

이윽고 약속이나 한 듯 새어 나오는 한숨~ 그럴 수밖엔 없었다. 이날 두 사람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의 호출을 받고 불려 가서 호된 취조를 받았는데. 이유는 주막집에 번지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그것은 내 나라 내 땅이지만 어쩌다 보니 빌어사는 나그네의 신세가 되고만 망국의 서러움을 한껏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땅을 빼앗긴 민족은 이제 말을 뺏기고, 글을 뺏기고, 전통적인 문화의 모든 것을 빼앗길 운명에 있는 암흑의 시대였다.

백년설 나그네 설움 음반
백년설 나그네 설움 가사지

침울하기만 한 상념 속에서 마지막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불끈 쥔 주먹에 담뱃갑을 구기던 '고려성'은 갑자기 모든 동작을 멈춘 채 시선을 허공에 응결시켰다. '나그네'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꾸겼던 담뱃갑을 다시 펴고 선술집 토막 연필을 얻어, 이렇게 한 줄을 적어 내려갔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나그네 설움'이다.

가사는 고려성, 백년설과 함께 같이 태평레코드사에 몸담고 있던 작곡가 이재호에게 넘겨졌다. 스스로 귀재라고 일컫던 이재호, 그는 어느 겨울, 폭설이 온 장안을 뒤덮고 있을 때 금단추 제복에 외투도 걸치지 못한 채 바이올린 하나만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사나이였다.

좌로 부터) 백년설, 전기현, 이재호, 고려성(본명 조경환)


남인수와는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라는 그는 처음 OK 레코드사에 몸을 담았으나 여기서 문호월, 속목인, 김해송, 박시춘 등 거성 틈에 껴 빛을 못 보게 되자 이를 벗어났다.

그는 OK 레코드사와 함께 우리나라 초기 레코드계에서 쌍벽을 이루던 태평레코드사와 손을 잡고 박향림, 백년설의 신인을 기용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더욱 이재호 백년설 콤비는 바로 가요계의 신화를 이룬 박시춘, 남인수 콤비 못지않은 무게를 갖게 되었으니 가히 '이재호'의 재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호가 완성한 곡은 물론 '백년설'이 그 녹음을 맡았다.

좌로 부터) 남인수, 이화자, 백년설 / 공연 포스터(1942년)


원래 대중의 인기란 극히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레코드란 출반되서 고객 손에 들어가기 전에는 정말 그 반응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 설움'이 수록된 음반만은 태평레코드사에서도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내놓았다. 당사자들의 기분을 짐작할 만하다.

어떻든 이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정확한 통계 자료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나, 1940년 당시 태평레코드 창사 이래 최고의 판매 실적인 10만 장이 넘는 매상을 올렸다고 하는데(그 시절에 발매지는 한국, 만주, 중국 일대, 일본 등 우리 교포가 사는 전 지역) 불과 1년 전(1939년)에 데뷔한 '백년설'이 당대 최고의 가수인 채규엽, 남인수를 일시 능가할 만큼 인기를 얻게 된다.

가수 백년설이 노래하는 모습 (1968년)

특히 작은 규모의 레코드 회사인 태평레코드의 이재호, 백년설의 콤비(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등)는 가장 규모가 크던 오케레코드의 남인수, 박시춘 콤비에 필적할 만큼 인기를 얻었다.

이에 자극받아 오케레코드는 물밑 작업을 통해 벌금과 제약을 모두 감수하면서 당대 최고의 전속금을 지불하고 1941년 백년설을 스카우트하였다.

그 이후 80여 년, 오늘도 잊히지 않고 즐겨 불리는 이 노래는 남인수와 쌍벽을 이루며 1950년대까지 남자 가수의 전범(典範)이 되었던 백년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낭만적인 유랑 정서를 표현한 1940년 전후 트로트의 새로운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 백년설 '나그네 설움'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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