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곤소곤 소곤대던 그날 밤 / 천 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모질게도 밟아놓고 / 그대는 지금 어디 단 꿈을 꾸고 있나 / 야속한 님아 무너진 사랑탑아
달이 잠든 은물결이 살랑살랑 살랑대던 그날 밤 / 손가락 걸며 이별 말자고 울며 불며 맹세한 님아 / 사나이 벌판 같은 가슴에다 모닥불을 질러 놓고 / 그대는 지금 어디 행복에 잠겨 있나 / 야멸찬 님아 깨어진 거문고야
봄바람에 실버들이 하늘하늘 하늘대던 그날 밤 / 세상 끝까지 같이 가자고 눈을 감고 맹세한 님아 / 사나이 불을 뿜는 그 순정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 그대는 지금 어디 사랑에 취해 있나 / 못 믿을 님아 꺾여진 장미화야" (작사: 반야월, 작곡: 나화랑, 노래: 남인수)
누가 뭐라고 해도 만일 영원한 가요 황제'라는 타이틀을 줘야 한다면 아마도 남인수를 제외하고는 손을 꼽기가 별로 쉽지가 않을 것이다.
1961년 킹스타 레코드사가 전력투구하여 출반한 남인수의 마지막 히트곡 '무너진 사랑탑'은 우리 가요사상 명곡 가운데 명곡으로 손꼽힐 만한 곡이다.
가사도 가사려니와 작곡이나 편곡 어느 곳 하나 흠잡기 어려운 수작이다. 노래를 부른 남인수 역시 ‘가요 황제’라는 존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우리 가요계가 얻은 최고의 보석이다.
폭 넓은 음역대와 정확한 발음, 흔들림 없는 음정, 거기에다 애조까지 더해져 가수로서 뺄 건 다 빼고 갖출 건 모두 갖춘 가성(歌聖)이다.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모질게도 밟아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단꿈을 꾸고 있나 '야속한 님아
떠나간 야속한 님을 두고 원망도 후회도 아닌 사나이의 체념을 담은 가사는 물론이려니와 작곡가 나화랑의 특이한 곡상이 듣는 이의 심금을 여지없이 찢어놓고 있다.
아마도 남자의 순정을 이처럼 분명하게 직설적인 수법으로 파헤친 가요가 몇 곡이나 우리 가요사에 남아 있는지 자못 궁금스러운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너진 사랑탑'이 가지고 있는 비중은 병중에 있던 남인수가 최후로 피를 토하며 열창했다는 데에 있다 하겠다.
당시 남인수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특별히 제작한 병실 침대 마이크 앞에 앉았다. 그리고 몹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취입한 이 곡은 가요 황제 남인수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특히 순간순간을 신열과 호흡으로 살아야 했던 남인수가 그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그나름의 끈질긴 집념 때문이었다.
가수 생활 30여 년을 뚜렷하게 장식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칠 노래가 필요했다. 결국 남인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이 '무너진 사랑탑'을 부른 셈이 되었다.
마치 봄날의 소쩍새가 피를 토하며 울어 울어 젖히듯 그 남은 생명력을 불태워가면서 맑고도 애절한 목소리로 '무너진 사랑탑'을 불러 그의 절창으로 삼았다.
지금 남인수는 가고 없지만 여기 '무너진 사랑탑'은 남아 영원히 그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우리 가요사의 보석같은 존재 가수 '남인수'
1940~50년대 우리 가요계가 얻은 최고의 보석 남인수(1918~1962)는 1936년 열 여덟 살 때 ‘눈물의 해협’(2년 뒤 ‘애수의 소야곡’으로 고쳐 불러 히트함) 으로 입문하였다.
'애수의 소야곡', '무너진 사랑탑',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의 노래로 1940~50년대에 궁핍한 민중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던 가요계의 제왕이었다.
그는 ‘가요 황제’라는 존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우리 가요계가 얻은 최고의 보석이다. 폭 넓은 음역대와 정확한 발음, 흔들림 없는 음정, 거기에다 애조까지 더해져 가수로서 뺄 건 다 빼고 갖출 건 모두 갖춘 가성(歌聖)이다.
경남 진주 태생으로 그의 본명은 최창수 이지만 어머니가 개가를 하는 바람에 강문수라는 이름을 얻었고, 데뷔 당시에도 강문수라는 이름을 썼으나 다음해부터 남인수로 활동하였다.
강문수는 그 무렵 흔히 가수 지망생들이 그랬듯이 무작정 상경했다. 그래서 문을 두드린 곳이 작곡가 박시춘이 있던 시에론레코드.
그에게서 목소리 테스트를 받고 소위 쯔메에리(つめえり. 학생복으로 사용된 목을 두르는 옷깃이 있는 양복 상의) 차림의 이 떠꺼머리총각이 부른 노래가 시에론레코드에서 처음으로 발매되었으니, 그것이 1936년 열 여덟 살 때 녹음한 '눈물의 해협이었다.
하지만, 기분을 내어 불렀음에도 반응이 신통치 않아, 나중에 가사만 개작하여 오케레코드에서 다시 녹음한 것이 바로 '애수의 소야곡'이다. 달콤한 그의 목소리는 대중의 환호를 받았고 그는 일약 최고인기가수가 되었다.
이로부터 박시춘, 남인수는 확실한 콤비가 되었으니, 오케레코드와 태평레코드가 각축전을 벌이던 그 가요의 황금시대 이래 근 30년 동안 우리 가요계에 솟구쳐 달렸던 커다란 산맥이었다.
'꼬집힌 풋사랑','감격시대','낙화유수 '등 해방 전에 150곡 정도를 불렀고, 해방 후에 '가거라 삼팔선','달도 하나 해도 하나' 등 200여 곡을 부른 남인수는 때마다 시대 감각에 맞는 노래를 불러 늘 가요계의 정상에 군림했다.
남인수는 6.25 전쟁 직후에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불러 만년 가수로서 성가를 높였고, 작고 석 달 전까지 병든 몸을 이끌고 무대에 섰다.
그는 순회공연 때 여관에서 머리카락이 흐트러질까 봐 목침을 베고 잘 만큼 깔끔한 성미에 야구, 배구 등 스포츠에도 능하고 당구도 500을 치는 멋쟁이였다. 그런 남인수에게 스캔들이 없을 리 없었다. 화려한 스캔들의 파노라마 속에 노래하며 달려간 정열아.
그가 45세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고 1962년 6월 30일 최초의 연예인협회장이 엄수되었을 때, 악단은 장송곡 대신 그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을 연주했다.
상객들은 귓전에 흐르는 그 선율에 따라 울먹이며 고인의 그 간드러지도록 달콤한 목소리를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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