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 궂은비 나리던 그 밤이 애절쿠려 /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 /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깨무는 입살에는 피가 터졌소 / 풍지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구려 / 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 / 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 잊느냐 -'번지 없는 주막' 전문
'번지 없는 주막'은 '나그네 설움'에 버금가는 백년설의 대표작으로 초라한 주막에 피는 한 토막 정담을 영롱하게 그려내고 있는 노래이다.
이 무렵 백년설(1914 ~1980)의 인기는 라이벌 남인수를 능가했고 백년설의 소속사 태평레코드는 남인수의 소속사 오케레코드와 어깨를 겨눌 정도였다.
식민지 대중의 유랑과 상실감을 표현한 탁월한 가사는 조명암과 당시 작사계의 쌍벽이었던 처녀림(박영호)의 작사이며, 작곡은 이재호가 일제 음반 사전검열 제도의 틀 속에서 가락을 지었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백년설이 부른 이 노래는 1940년 태평 레코드사의 음반으로 나와 전국에 퍼져나갔다.
특히 이재호, 백년설은 오케레코드사의 박시춘, 남인수의 콤비와 맞겨누던 태평레코드의 콤비였으며, 당시의 SP판은 약 6만 매를 상회하는 판매기록을 올렸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 할 수있다.
이재호는 1938년 리갈, 콜럼비아, 태평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태평레코드의 중추적인 작곡가로 자리 잡았다.
1940년대 초 작은 규모의 태평레코드가 가장 큰 규모의 오케레코드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소속된 가수 몇 사람이 타 레코드 회사의 여러사람의 가수가 발표하는 수십장의 레코드보다 더 큰 판매량을 보였기 때문이며, 태평레코드사에서 이 곡들의 작곡을 대부분 이재호가 담당하였다.
이재호, 백년설의 콤비 작품인 이 노래는 지금도 곧잘 불리는, 그래서 잊히지 않는 노래가 되었다.
말한다면 순정이 순정으로 통할 수 있었던 시절, 비록 술은 팔아도 순정은 만은 고이 간직하려던, 그래서 정이 들면 고이 간직했던 모든 것을 함빡 쏟아 후회 없던 그러한 시절에의 향수가 이 노래를 찾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선율도 이재호의 장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애처로움에 차있다.
‘번지 없는 주막’은 1961년 강찬우 감독, 김승호·박암·도금봉 출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 백년설-번지 없는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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