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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빛낸 유행가

작사가 반야월의 가슴 아픈 가족사가 서려 있는 노래, 이해연 ‘단장의 미아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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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해연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수록된 음반 표지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 한 많은 미아리고개

■ 대사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 어린 용구는 오늘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에 얼마나 고생을 하세요 /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 / 네 여보 여보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 한 많은 미아리고개

위 노랫말은 TV조선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에서 송가인이 부르며 재조명된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 이다.

이 노래는6·25전쟁으로 딸을 잃은 작사가 반야월의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전후 가요의 걸작이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이며 노래는 한국 전쟁 휴전 후인 1956년 가수 이해연(1924~2019)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려졌다.

가수 이해연 단장의 미아리고개 음반
가수 이해연(1924~2019)

제목의 ‘단장(斷腸)’은 말 그대로 장을 끊어내는 듯한 고통을 말한다.

이 노랫말을 쓴 작사가 반야월은 자신의 어린 딸을 전쟁 중에 잃은 개인적 경험과 연결 지어, 미아리고개에서의 이별이라는 주제로 가사를 썼다.

1950년 9월 초, 피란 떠난 남편을 기다리던 반야월의 처 윤경분은 어린 딸과 함께 피란길에 나섰다. 서울 미아리고개를 막 넘었을 때 허기를 견디지 못한 어린 딸이 자욱한 화약 연기 속에서 숨을 거뒀다. 정신없이 돌무더기를 만들어 딸의 시신을 묻어야 했다.

가수 이해연 단장의 미아리고개 가사지

이후 반야월은 1·4후퇴 후 전파로 잿더미가 된 서울로 돌아와 보니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던 부인은 영양실조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고 둘째 딸은 사망하고 없었다.

차녀 수라(당시 6세)양은 돌무더기를 만들어 딸의 시신을 입은 옷 그대로 언 땅에 묻어야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못내 잊을 수 없어 이를 가요화했다고 한다.

이 사연을 들은 많은 가요인들은 심금을 울리는 듯한 공감의 열창을 아끼지 않았고 이는 6, 25 전환비극의 하나로 민족적 통탄의 서정시로 남아있다.

이재호 작곡집에 수록된 단장의 미아리고개 악보. 1958년 간행
KBS한국방송 가요무대에서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열창하고 있는 가수 이해연(1988년)

미아리고개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과 길음동 사이에 있는 고개다. 1950년 6월 27일 북한 인민군 탱크가 처음 밀고 왔다가 그해 9월 28일 퇴각한 곳이다. 그들은 퇴각하면서 각계 인물들을 강제 납북했다. 이들이 가족과 마지막 생이별을 한 곳이다.

1996년 8월에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비가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 정상에 자리한 아리랑 아트홀(현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에 건립되었다.

1957년 시민 위안의 밤 공연에서 노래하는 가수 이해연

가수 이해연은 1924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941년 데뷔한 이해연은 '뗏목 이천 리', '소주 뱃사공', '아리랑 풍년', '황해도 노래' 등을 불러 큰 사랑을 받았다.

또 1950년대 후반 미8군쇼 무대의 실력자였던 베니김(김영순)의 부인이며, 당시 손꼽히는 팝송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 이해연 ‘단장의 미아리고개’ 감상하기

 

▶ 송가인 ‘단장의 미아리고개’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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