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 google00ba2143d583234e.html 유로댄스 그리고 1980년대 '디스코 나이트 클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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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 가는 음악여행

유로댄스 그리고 1980년대 '디스코 나이트 클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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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나이트클럽 신문 지면광고

1980년대는 1973년과 1979년 2번의 오일쇼크 후유증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경기가 호전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점점 좋아졌다.

 

먼저 장발 단속 완화, 통행 금지 해제,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등 일련의 개방화 정책으로 국민들을 회유하기 시작한 신군부정권은 이어서 컬러TV 방영과 프로야구, 프로씨름의 개막을 통해 대중들의 관심을 오락과 스포츠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가장 활발한 성업이 시작된 곳은 소위 유흥가였다.

 

그 중에서도 심야다방과 가라오케 그리고 통행금지제도가 사라지면 모두 망해버릴 줄로만 알았던 여관이 오히려 자유로운 심야 활동과 함께 더욱 성업하기 시작하였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나이트클럽 신문 지면광고


하지만 그들 모두 나이트클럽의 번성에는 명함도 못 내미는 정도였다.

 

흔히 '닭장'으로 통했던 '디스코 나이트클럽'은 1980년대 호황기와 정부의 '3S정책'(스크린·스포츠·섹스)에 따라 즐기고 노는 '유흥가' 문화가 발달하면서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이들만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춤방은 무도장인 캬바레, 쇼를 보여주던 나이트클럽, 그리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음료나 맥주를 마시며 춤을 추던 입장식 디스코텍의 혼합 형태인 디스코 나이트가 등장함으로써 향유 연령대와 업태가 다양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시대가 소비 지향적으로 급변하면서 음악에서도 생각하는 음악보다는 춤추고 즐기는 소모성 음악(댄스뮤직) 풍토로 바뀌어 가게 된다.

 

그리고 1980년대의 디스코 나이트클럽은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맵싸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화려한 감정배설의 출구였다.


■ 1980년대 디스코 클럽 풍경

1980년대 디스코테크에서 춤추는 젊은이들

한쪽에서는 가발을 쓴 고등학생들이 짙은 화장으로 애티를 감춘 채 담배를 꼬나물고 사뭇 술을 짬뽕해서 마셨고, 그 모습이 조금은 불량스럽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1류를 꿈꾸는 3류 DJ들은 '모던 토깅'이나 '런던 보이스', '조이'같은 폭발적인 유로비트의 댄스를 틀어대면서 술 취한 손님들을 광란의 밤으로 인도 해주었다.

1980년대 유로댄스하면 빼어놓을 수 없는 팀 London Boys(런던 보이스)


그러다 가끔 'Itswa Mayumi'의 '戀人よ (고이비토요)' 같은 일본의 엥까도 스피커를 통해 나오기도 했다.

아무튼 모든 것이 그럴 듯 했습니다. 클럽마다 꽉꽉 찬 담배연기는 밤안개처럼 당시의 밤을 휘감았다.

새파란 고등학생들, 소위 나이트의 멋을 안다고 자부하는 날라리들과 목청 높은 샐러리맨들로 대만원 이었다

이렇듯 어딘가 퇴폐적인 냄새가 코를 찌르고 가끔은 거친 언어와 막가는 몸짓이 난무하는 불안한 질서로 유지되는 공간 이었지만 그래도 1980년대를 보낸 젊은이들에게는 닭장은 여전히 호기심의 대상이 이었다.

 

하루 종일 좁고 답답한 도시의 일터와 강의실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던 젊은이들은 때론 지쳐 흐느끼며 술과 우정으로 위안을 받으며 이룩한 문화적 성지였다.


■ 우리 젊은 날의 유로 댄스

오스트리아출신의 3인조 인기그룹 조이(Joy)

Arabesque의 뽕짝스런 리듬같던 HelloMr. Monky, '둘리스, 놀란스, 징기스칸, 핑크레이디 등의 '빌보드와 무관한 아티스트들'의 신나는 디스코음악에 뒤이어 1980년대의 팝(POP)음악계의 가장 큰 이슈중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지구촌 곳곳에서 메아리 쳤던 유로댄스의 열풍으로 당시 국내 에서도 식을 줄 모르고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1980년대 중반 팝송 좀 듣는다는 10대, 20대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건 16비트의 경쾌한 유로댄스였다.

 

1980년대 중후반 유로댄스 장르의 대표주자였던 데이비드 라임(David Lyme)


유럽의 정서가 어우러지는 신나는 유로비트의 리듬을 찾게 하는 것인지, 또는 팝음악의 추세에 민감한 젊은 층의 고조되는 열기에 맞추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당시 국내에서도 클럽 DJ들에 의해 유로댄스 의 음악적인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음악팬들에게 뜨거운 찬사를 받기 시작했다.

 

런던 보이스의 ‘할렘 디자이어’, 모던 토킹의 ‘브러더 루이’, 조이의 ‘터치 바이 터치’ 등이 대표적이다. 10대와 20대에게 허락된 공간은 ‘롤라장’과 나이트클럽으로 갈렸지만, 너나 없이 심플한 멜로디와 가슴 뛰는 강한 비트가 결합된 유로댄스에 열광했다.

 

이 유로댄스의 열기를 몰고 온 첫 신호탄은 디히터 볼렌의 프로젝트 모던토킹 이었다.

독일의 일렉트릭 댄스 팝 그룹 모던 토킹(Modern Talking)


모던 토킹(Modern Talking)은 독일의 일렉트릭 댄스 팝 그룹으로 1980년대 초중반 국내 상륙한 유로팝의 선두주자였다.

 

특히 쏘울풀하고 훵키한, 디스코의 범주에서 완벽하게 달아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중성적인 보컬 음색으로 전국을 사로잡은 모던 토킹은 '클럽 댄스뮤직'의 대표가 되었다.

 

1980년대 초창기 유로댄스 가수 Dee D Jackson


1980년대 클럽에서 유행했던 초창기 유로댄스 중 Dee D Jackson의 'SO S (LOVE TO THE RESCURE)'도 명곡으로 꼽을 수 있다.

 

섹시하며 허스키한 창법이 매력만점이었던 이 곡은, 당시 클럽에서 이 음악이 흘러나오면 집게손가락과 엄지로 'S'와 'O' 문자를 만들어 춤을 추었던 기억이 새록 록 피어오르는 유로 댄스의 명곡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유로댄스하면 이 팀을 빼어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London Boys이다.   

1980년대 유로댄스하면 빼어놓을 수 없는 팀 런던보이스(London Boys)


'I'm Gonna Give My Heart' 'Harlem Desire','LondonNight' 등의 초특급 히트 싱글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등장한 이들은 한국공연을 시도했으나, 공연장으로 대관한 학교의 체육관을 학생들의 공연 반대 점거농성으로 빼앗기는 바람에 결국 공연이 무산되고 마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프렌치하우스의 고전 Debut De Soiree의 'Nuit De Folie'('쏭투 쏭투 쑝!')


이렇게 굵직한 '수퍼 아티스트들'과 데이빗 라임, 배드 보이즈 블루, 내한공연을 가진바 있는 조이 등의 산발적 히트 메이커들, 그리고 그 멜로디를 들으시면 모두가 알 수 있는 리게이라(Righeira)의 그야말로 전설적인 히트곡 'L'estate sta Finendo'(그 유명한 섹스폰 전주!), 프렌치하우스의 고전 Debut De Soiree의 'Nuit De Folie'('쏭투 쏭투 쑝!')와 그 속편 격인 'La Vie, La Nuit'은 '광란의 밤'을 지새우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던 노래들이었다.


■ 그 시절의 젊은 오빠! 디스코 클럽 디제이

디스코 DJ란, 나이트클럽에 음악을 제공하는 사람을 말한다.

 

라디오의 DJ와 클럽의 DJ와 무엇이 다른 거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라디오의 DJ는 토크 중심으로 전개해 청취자와 일상적인 사건을 희로애락을 혼합하면서 진행하는데 반해, 클럽 DJ라고 하는 것은 레코드, CD등의 음원을 구사해 댄스홀에 강렬한 약동감을 만드는 종합 뮤지션 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디스코 디제이의 시작은 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디스코가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1970년대 말부터 디스코와 함께 본격적으로 디스코 클럽이 상륙 되면서부터 '디스코 디제이' 라는 신종 직업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1980년대 인기 프로그램 쇼비디오 자키를 진행한 디제이 김광한


어와둥둥 내 사랑을 흥얼거리며 들썩거리는 춤사위 이후에 댄스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디스코는 장소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다방이나 술집 등에서 디스크자키가 유리박스 안에서 관객들에게 말을 시키면서 노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즐기는 식이었다.

 

당시 디스코 DJ는 기본적으로 그 업소의 전속으로 있거나, 이따금 같은 인맥을 통에 돕는 사람으로서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클럽 DJ는 기본적으로 프리로, 거물의 경우는 게스트 DJ로서 전국적으로 많은 클럽에서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디스코보다 더욱 선명한 리듬의 유로 비트의 댄스가 등장하면서 음악의 빠르기인 BPM(beat per minute)에 집중하여 앞 곡과 뒷 곡의 BPM을 절묘하게 맞춰 마치 한곡인 듯 하게 끊임없이 믹스하는 비트 믹싱이라는 기술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1980년대 팝송 타잔보이(Tarzan Boy)로 디스코 클럽을 휩쓸었던 가수 발티모라(Baltimora)


LP 플레이어의 속도 조절장치와 믹서의 페이더를 이용한 이 기술은 점점 발전하여 빠르기가 비슷한 두 곡의 리듬 부분, 그리고 다른 주파수 대역을 함께 플레이하여 새로운 곡을 만드는 리믹스로 발전했고 결국 우리나라의 DJ들도 아티스트로 발전하는 데 이르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쉐이크 요 바디, 무브 요 바디', '컴온에브리바디' 등의 짤막한 멘트들은 결국 댄스뮤직의 반주 아래 랩을 하는 MC로 발전하게 된다.

 

비트 믹싱과 멘트. 이 두 가지 종목은 디스코 DJ들에게 필수적인 항목으로 발전하게 된다. 기술적 완성도가 있는 비트 믹싱을 선보이든가, 관중을 집중시키는 멘트를 활용하는 것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독일의 일렉트릭 댄스 팝 그룹 모던 토킹(Modern Talking)


1980년대에는 디스코 DJ의 중요성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특히 1983년에는 디스코DJ '최성훈', '이진', '이세훈', '한용진' 등 유명 DJ들이 디스코 DJ 연합회를 만들었으며, DJ들의 자질향상을 위해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륨에서 Rock&Disco Festival을 개최하는 등 많은 행사가 펼쳐졌었다.

 

이외에도 KBS TV의 '한바탕 웃음으로', '쇼 비디오 쟈키', '행운의 스튜디오', '지구촌 영상음악'과 'BBS', 'TBS' 등의 라디오 프로에 인기 디스코 DJ들이 출연하여 대중들에게 리믹스 음악을 선보여 줌으로서 80년대 리믹스 음악이 뿌리내리는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1980년대 클럽 댄스들의 엄청난 물결 속에 1980년대의 '댄스뮤직'의 목표는 간단했다.

 

댄서블한 리듬, 그리고 단 한 번에 모두 휘어잡게 만드는 휘발성 강한 멜로디라인.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잘 생긴 보컬리스트나 알아듣기 쉬운 가사 등은 무시됐다.

 

그것은 '‘춤추는 곳에서 고민 따윈 하고 싶지 않다.’라는 정서와도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다.

 

■1980년대 나이트클럽음악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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