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 눈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 다정히 손잡고 고개 마루 / 넘어서 갈 때 흰머리 날리면서 /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 멀어진 나의 고향역 (작사. 작곡 임종수)
'고향역'은 고향을 소재로 한 많고 많은 대중가요 중에서도 정말 시대를 초월한 명곡으로 꼽히는 노래이다.
고향역은 1972년 2월에 발표되고 그해 추석 즈음 크게 히트한 노래이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고향 기차역의 정취를 애절하게 그렸다.
지금도 나훈아의 대표곡으로 많은 분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향역은 그보다 앞서 원작이 따로 있다. 1971년 신인 작곡가 임종수 작사․작곡 나훈아의 ‘차창에 어린 모습’이 원곡이다.
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 단 한 번 정을 준 그 사람을 홀로 두고서 / 혼자만 몸을 실은 열차는 외로워 / 눈감아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
우연한 인연에 만난 그 사람 / 이별이 있을 줄 알면서도 잊지 못하고 / 기적에 작별인사 열차는 무정해 / 멀리가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고향역 원곡 나훈아의 ‘차창에 어린 모습’ 가사)
그러나 ‘차창에 어린 모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발표되자마자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정부가 불건전한 가사가 국민의식개혁 운동과 어긋난다며 슬픔·이별·상처 등의 가사가 들어간 노래를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1971년 12월 나훈아가 “임종수에게 ‘차창에 어린 모습’이 너무 좋은 곡인데 아쉽다”며 “건전한 내용의 가사와 리듬을 트로트에서 경쾌한 고고로 바꿔 다시 불러보자’고 제안했다.
임종수는 중학교 때 황등역에서 이리역까지 통학하면서 기찻길 옆에 핀 코스모스를 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기억을 되살려 새로운 가사를 썼다. 이 곡이 바로 ‘고향역’이다.
그리고 1972년 2월 노랫말과 리듬을 바꾸어 재녹음하여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해 불멸의 히트곡 ‘고향역’이 태어났다.
'나훈아'는 1951년 항도 부산에서 최홍기를 본명으로 태어났다. 학교 공부보다는 운동과 노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교생 때 무작정 상경하였다.
작곡 사무실을 찾아가 사환을 자청하여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꿈을 키우던 그에게 예상보다 빨리 행운이 찾아온다. 취입하기로 예정된 가수가 나타나질 않자 누군가 장난으로 사환인 그를 대신 마이크 앞에 세웠고, 당연히 웃음거리로 끝날 줄 알았던 그 일은 대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의 노래를 들은 주변 관계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즉석에서 가수로 발탁하였다. 그의 나이 18세이던 1968년의 일이다.
그렇게 가수가 된 그는 당시 가요계의 기린아였던 남진과 서로 정상의 자리를 주고받으며 우리 가요사에서 최고의 맞수 관계를 구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향역'은 노랫말처럼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1962년 혁명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달성해 나가던 1960년대 초! 모두들 잘 살고 싶어 했으나 아직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의 한국이었다.
쌀이 모자라 관에서는 분식을 장려했고 보리쌀을 섞지 않은 도시락을 학교에서 가려내고 있었다. 맨발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등교하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농촌의 사정은 도시보다 더욱 어려웠다.
1960년 당시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농가에 자식은 보통 7~8명이나 되다보니,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져, 자식들은 마침내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을 한다.
돈을 벌어 집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양식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또한 1960년대 공업화와 근대화의 물결은 많은 농촌의 젊은이들을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게 하였던 시절이었다.
젊은이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동네 또래 몇 명과 함께 고향을 떠나 도시의 공장에 취직을 한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니 달리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생전 처음 공장일을 해보았다. 전기로 돌아가는 요란한 기계 소리를 들으며 어설펐지만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을 배웠다.
당시는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하루 14~15시간 고된 일을 해야 했고, 쉬는 날은 한 달을 통틀어 이틀뿐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요, 점심 저녁을 회사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했다. 그리고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하지만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 속에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도시는 너무 차갑고 외로운 곳이었다.
이즘에 대중가요계는 이런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랫말들이 등장한다. '물레방아 도는데','머나먼 고향',등 당시 젊은이들은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그리워지는 것은 고향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사무친 향수에 잠겨서 살아가던 때였다.
그래서 명절엔 10시간이 걸리든 20시간이 걸리든 선물을 사 들고 그리운 고향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사람들은 금의환향의 맹세를 남기고 떠났던 청운의 몸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해도 명절이면 시골집으로 달려갔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고향 집을 찾았다.
요즘 세대들은 이 시절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살아 왔던 가에 대한 절실한 체험이 없겠지만 이 노래를 불렀던 중장년층들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어느 뒷골목 선술집에서는 넋두리와 함께 이 노래가 수놓아졌다. 장단을 맞추어 가며 때로는 서로 부둥켜안고 이 노래를 합창했다.
그리고 '고향역'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산업화 위주로 재편되던 전환기 사회의 내면을 현실적 서정으로 포착한 수작으로, 흥겨움 속에 숨겨진 슬픔의 정서를 담고 있는 노래이다. 그것은 산업화 시대, 일을 찾아 도시로 떠나갔던 자식들이 명절을 맞아 꿈에도 그리던 고향 집으로 돌아오는 60~70년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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