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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빛낸 유행가

남도의 항구 도시 목포를 상징하는 노래, 이난영 목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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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실린 음반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1935년, 작사:문일석 작곡:손목인)

위 노랫말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고전 명곡으로 꼽히는 '목포의 눈물'이다.

가신(歌神)으로까지 불리며 1930년~40년대 최고의 가수로 활동한 이난영(1916~1965)의 대표작으로 1935년 오케이 레코드에서 발표한 작품이다.

한 가수가 일생을 통해 발표하는 곡이 다수이겠지만 하나의 절창을 이루어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가수 이난영(1916~1965)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우리는 그녀의 절창으로 '목포의 눈물'을 손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애창가요 중에서 이 노래만큼 널리 사랑을 받았던 가요는 흔하지 않다. 이 노래는 이난영 개인의 품을 떠나 민족의 애창곡이 된 지 오래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듯, 목포의 향토색 짙은 항구 풍경을 보여주는 노래이다.

목포의 눈물 음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원래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는 것이 인생의 정리, 떠나는 슬픔이 있다면 돌아오는 기쁨도 있는 것이 항구이다.

왜인지 예부터 항구는 이별의 슬픔을 말할지언정 만나는 기쁨은 말하지 않는 것이 되어왔다.

그 가운데에서 목포는 가장 오래인 항구의 하나이다. 그러다 보니 그만큼 눈물의 사연도 그리움으로 쌓인 것이 목포였다.

'항구에 선 새 아씨, 시집온 지 얼마 안 되는 새 아씨의 모습은 굳이 원색이 선명한 치마저고리가 아니더라도, 그 다소곳한 눈매며, 토홍 색 빰으로 알 수 있다.

아득한 수평선을 향해 망연히 눈을 던지는 그녀의 귓전을 가물거리는 사공의 뱃노래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과연 그녀는 듣고 있는지 보니 그녀의 옷자락은 눈물에 젖어있었다. 다시 궁금한 그 눈물의 사연'....

목포의 눈물 가사지


이 '목포의 눈물’은 1935년 1월, 당시 일간지 조선일보사와 오케 레코드사 공동 주최로 '제1회 향토 노래 현상모집' 공모를 통해 목포 출신의 시인 문일석이 응모한 작품이다.

가요의 노랫말보다는 오히려 향토색 짙은 한 편의 서정시라고 옳을 정도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 가사에 도쿄 음악원을 졸업한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이난영의 목소리로 세상에 태어났다.

특히 제2절 첫대목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는 검열을 우려해 발음이 비슷한 다른 가사지가 인쇄되기도 했다.


이난영은 1916년 목포 양동에서 태어나 가난한 유년시절에 학교를 그만두고 악극단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가 막간 가수로 발탁돼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그녀의 데뷔는 O. K레코드사였다. 그리고 그녀가 O. K레코드사에 전속되기 전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바로 목포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돌하게 무대 뒤에 찾아온 열여섯 다박머리 소녀!! 가수지망이라는 그 소녀의 말을 따라 테스트를 해본 박승희는 즉석에서 승낙, 당일로 무대에 등장시켰다.

목포의 눈물 재판 가사지


이렇게 해서 무대에 올라서게 된 그녀는 그 길로 태양극장을 따라 오사카까지 순회공연에 나섰다. 마침 업무로 오사카에 출장 왔던, O. K의 사장인 '이철'이 듣고는 그 길로 스카우트, 데리고 현해탄을 건너고 말았다.

뒤늦게 야 이것을 알게 된 <박승희>는 강력한 항의를 했지만, 본인의 희망이 그런지라 결국 O. K레코사에 낙착, 그녀의 첫 취입에 '목포의 눈물'을 받아 여기 엘레지의 여왕이 탄생되었다.

이난영이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까랑꼬'라는 이름으로 녹음한 '목포의 눈물' 일본어 버전 '이별의 뱃노래' 음반.


어떻든 '목포의 눈물'이 나오자 목포는 가장 유명한 항도가되었고, 이난영은 영원한 노래의 성좌에 올라앉았으며, 드디어는 영화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를 만들게까지 하였다.

특히 이 '목포의 눈물' 인기는 한반도를 넘어서 일본으로까지 전해지기도 했다.

발표 이듬해인 1936년에 이난영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까랑꼬'라는 이름으로 녹음한 '목포의 눈물' 일본어 버전 '이별의 뱃노래'도 발표했다. 물론 제목과 가사는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 '목포의 눈물'의 주인공 이난영의 삶


'목포의 눈물'의 주인공 이난영은 순진했고 어떤 면에서는 세상을 잘 몰랐다. 그녀를 떠올리면 김해송이라는 작곡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김해송은 당시 가수 지망생으로 OK 레코드사 문예부장 문호월씨를 찾아와 테스트를 받았으나 퇴짜를 맞았다. 보기에 안된 그를 작곡가'손목인'이 불러 "너는 음악적 소질은 있으나 노래는 안되겠다.

나와 당분간 같이 지내면서 작곡을 배우라"라고 말했다. 마침 조선 악단에는 기타가 하나 비어 있어서 그를 악단 멤버로 끌어들인 '손목인'은 동생처럼 대하며 작곡을 배워줬다.

다시보는 문화영화에서 흘러간 옛노래(1960년 제작)


김해송은 머리가 좋고 재질이 있어 날로 실력이 향상됐다. 그러나 그에겐 좋지 않은 습성이 있었다.

연예인이 되다 보면 많은 여성 팬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함께 어울리는 수도 있겠지만
어느 선에서는 깨끗하게 끊어줘야 하는 것이 도리이다.

김해송은 여자 문제에 있어 절제라는 것을 몰랐다.


공연 가는 곳마다 사건을 일으켜 말썽을 빚곤 했는데 한 번은 지방 공연 도중 이난영을 겁탈해 임신까지 시키고 말았다.

결국 김해송은 이난영과 결혼해 일을 일단락 지었지만 그 이후에도 그의 여성편력은 계속됐다.

주위에서 아무리 말려도 그때뿐이지 눈만 다른 곳으로 돌리면 또 일을 저질렀다.


자업자득이라고 김해송은 공연기간 팬이라며 찾아온 유부녀를 건드렸다가 큰 코를 다쳤다. 둘의 관계를 알아낸 그 여자의 남편이 간통죄로 김해송을 고소해버린 것이다.

꼼짝없이 걸려든 김해송은 몇 개월 간 형을 살아야 했다. 경찰에 끌려가는 남편 김해송을 울면서 전송하는 이난영의 모습은 그녀의 목소리 못지않게 애처로웠다.

이난영과 김해송 사이에는 9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유명한 김시스터즈와 김 부라더스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해송과 이난영의 두 딸(김숙자,김애자)과 이난영의 오빠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로 구성된 김시스터즈


이난영은 해방 직후에 남편 김해송과 함께 KPK악극단을 조직하여 주한미군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6.25 전쟁 때 남편을 잃고 힘겹게 KPK악극단을 이끌다 후배가수 남인수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62년, 사실혼 관계에 있던 남인수 마저 세상을 떠나자 약물과 술에 기대어 살다가 1965년에 그 굴곡진 삶을 내려놓고 우리들 곁을 떠났다.

지금도 그녀의 노래비엔 꽃이 끊이지 않는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 연예인 협회에서는 협회장을 결정, 스스로의 생애를 노래에 바치고, 당시 '김 보이스','김시스터즈'를 길러내어 못다 한 노래의 정열을 푼 그녀의 고향 목포에서는 그녀의 동상을 세워 노래 '목포의 눈물'과 함께 영원히 남을 그녀의 음악인생을 기념하고 있다.

▶이난영 목포의 눈물 감상하기


▶이난영 목포의 눈물 12 버전 감상하기

▶목포의 눈물 - 이생강(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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